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 선수들의 시대정신

선수노조 창단을 주도한 맨유 선수들과 ‘아웃캐스트 FC’

올드 트래포드가 건축 중이던 1909/1910 시즌 개막전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선수노조를 창단하는 캠페인에 참가하는 선수들에 대해 징계를 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맨유 선수단 중 선수노조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프리시즌 중에  ‘아웃캐스트’라는 팀 이름을 사용하고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축구협회의 징계 경고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잉글랜드에서 선수노조 형성의 움직임이 본격화됐던 것은 그보다2년 앞선 1907년 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선수는 맨유의 핵심적인 선수였던 찰리 로버츠와 빌리 메레디스였다.

 1907년 12월2일 맨체스터 시내의 임페리얼 호텔에  전국에서 약 500여명의 선수들이 모여든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선수들이 가장 불만을 가진 문제는 축구협회가 설정한 4파운드라는 주급의 상한선 이었다.  앞서 맨시티의 주요 선수들이 맨유로 대거 이적하게 된 배경으로 소개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문제였다.

축구협회가 1900년에 이 상한선을 도입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을경우 중소규모 팀의 뛰어난 선수들이 결국 모두 풍부한 자금력을 가진 빅클럽으로 이적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합리적인 이 축구협회의 규칙에 선수들이 불만을 갖기 시작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축구 그 자체의 인기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경기장을 찾는 관중의 수가 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1900년에는 관중이 1만 명을 넘는 경기가 드물었던 것에 비해  창단직후부터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며 인기를 모은 첼시의 경우  1910년 무력에는 평균 관중이 3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관중은 3배이상 늘었는데 선수들이 받을 수 있는 주급의 상한은 그대로라는 것은 선수들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맨유의 데이비스 구단주 역시 이런 선수들의 움직임에 적극 지지를 보내며 그와 같은 의사를 가진 다른 클럽의 회장들과 함께 축구협회에 변화를 촉구하는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축구협회는 선수들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그 분쟁이 계속 이어지던 것이 1909/1910 시즌 개막을 앞두고 맨유 선수들로 하여금 ‘아웃캐스트’라는 팀명을 사용하며 리그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행동을 취하게 했던 것이다.

축구협회로서도 바로 전 시즌 FA컵 우승팀이 리그에 참가하지 않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곧이어 리버풀, 뉴캐슬, 미들스브르, 에버튼 등의 타 구단들도 맨유 선수단의 움직임에 동참할 의사를 밝혔다.

결국 축구협회는 새 시즌의 진행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선수들의 노조 창설을 승인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선수노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선수협회의 전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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